나의 지인들 중에서,
먼저 유학을 경험했거나, 현재 유학 중인 분들께서,
우스갯소리로 지나가듯이 하셨던 말 중에,
‘한국사람인 우리가 포닥 자리를 구할 때, 단 하나 명심해야 할 점은
절대!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나라의 지도교수는 피할수록 좋다’라고 했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다른 나라를 비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많은 분들의 경험해 비춰보면,
일적인 부분에 있어서 시간에 개의치 않고, 연구실을 운영하는 몇몇 분들의
잘못된 지도 습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했었다.
처음에는 웃으며 나 역시 농담처럼 따라 하기도 했고, 한 귀로 흘려들었지만,
나의 경험에 빗대어 보더라도 결코 허튼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13년 9월에 시작된 나의 포닥생활은
University of Minnesota-twin cities에서였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익숙지 않은 영어와 낯선 미국 땅에서의 삶은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주변 한국교회에 다니시던 유학생과
직장인 분들의 도움으로 정말 편안하게 정착하고 적응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핸드폰 개통부터, 중고자동차 구입 그리고, 기숙사 등록까지
하나의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 포닥 역시, 대학원생과 동일하게 기숙사에서 생활 가능 (최대 5년으로 기억)
- 핸드폰 개통 시 미국 내 신용기록이 없는 관계로, $500 deposit
(1년 뒤, 등록된 주소로 check이 발송)
- 국제면허증으로 중고차 구입이 가능
- 한국 운전면허증은 유효하지 않고, 미국 운전면허필기 및 실기시험을 따로 쳐야 함
어려움 없었던 정착과 무난한 생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할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나였지만,
새로운 연구실에서 정확히 3일만에 관두고 싶었다.
내가 고용된 연구실은
중국인 교수와 연구원 (교수 wife), 중국인 포닥 1명으로 이뤄진 소규모 연구실이었다.
내가 떠나기 전까지 당시에는 몰랐다.
지금까지 교수가 부임한 이후, 내가 중국인 이외의 유일한 외국인 포닥이었음을…
1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포닥은 100% 중국인이었다.
2013년 9월 연구실에 출근한 첫날,,
서로 간단하게 인사하고 실험실에 앉아있었더니,
논문 한편을 주면서 positional cloning*에 관해서 이해하고,
앞으로 진행하길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 genetic screen의 한 종류, 이미 밝혀진 primer를 사용하여 알려지지 않은
유전자의 위치를 찾아가는 방법 https://en.wikipedia.org/wiki/Genetic_screen
기존에 알려진 primer를 정리하고 차후 진행될 실험에 대한 계획을 세움은 물론,
lab meeting에 발표할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내 노트북을 가져와서 일하려던 순간,
연구실에서는 컴퓨터 사용금지, 더불어, 일과시간에는 오직 실험만 해야 한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그럼 뭐해야 하지?’라는?’ 당황함에 가만히 서 있으니,
논문을 읽든지 청소하든지 라고 말을 해준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논문만 읽고 하루를 보냈다.
읽는 과정이 너무 지겨워서, 문장을 빈 종이에 옮겨 적었다.
종이도 아껴 써야 한다고 해서, 내가 미리 준비한 A4 용지를 사용했다.
점차 문장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마 몇 단락 정도는 단어 몇 개 틀리는 수준에서 그냥 다 적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순간은
7년이 지난 현재의 내 뇌리 속에 아직도 생생하다.
‘나 뭐한 거지?’?’ ‘이렇게 해도
둘째 날도 같았다. 셋째 날도 같았다.
연구실의 분위기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치열하게 실험하고 토론하고 논문을 쓰는 곳이 아니라,
그냥 그냥 그랬다… 후회했다…
이미, 학과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이었고,
다른 학과 한국인 대학원생과 포닥들에게도 나쁜 소문이 엄청나게 퍼진 곳이었다.
그런데, 소문이 아니었고 나에게는 현실이었다.
나의 실적을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새로운 연구실을 찾는 건 가능한지,
너무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고,
결국에 어떠한 선택도 이 곳에 머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 판단은 시간이 점차 흘러갈수록 확신이 되었던 것 같다.
이 곳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나름대로 그 틈새를 파고들어 최대한 연구비가 절약되는 실험을 했고,
심지어 다른 연구실에서 시약을 빌려오고,
다른 방 교수님께 자문을 구하면서 미래를 대비해 가던 중에….
갑자기 나에게 6개월 무급을 제안했다.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인 즉, 연구원으로 있던 교수의 와이프가 강사 자격에서 탈락되어
외부에서 월급을 받을 수 없으니, 되려 나에게 이런 부탁 아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추측컨대, 나에게 선택권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며, 미래에 대한 고민과 괴로움에 너무나 힘들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다른 학교 연구실에서 3개의 offer를 받을 수 있었고,
3년의 계약을 제시한 Ohio State University로 이직을 결정하였다.
그때의 힘듦과 고민의 시간은 지금 돌이켜봐도
다시금 겪어보고 다시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내가 offer를 받고, 당당하게 떠나게 됐음을 알림과 동시에,
화들짝 놀라는 교수의 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네가 다른 자리를 구했다고? 에이 네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직이 결정되어 인건비를 정산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서류 작업을 위해 다른 office에 다녀온 시간에 관해서
일분일초를 따지는 것은 물론, 책정된 인건비에 대해서 $1까지 하나하나
계산하는 것을 보면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이해하고, 떠나기로 했었다.
태어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첫 아이와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와이프가 혼자서 이사를 준비하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떠나기 1주일 전, 짐 정리를 시작하겠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사람이었는데,
교수가 나에게 한 마지막 당부는
“나의 개인적인 이유로 떠나는 결정을 한 것이지,
교수인 내가 너의 이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없다고 서류에 작성해줘.”
물론, 나를 미국에 올 수 있게끔 기회를 준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현재에도 정말 가끔 일적으로 연락해도
큰 문제없이 사이가 좋다.
이직 후, 만난 학회에서도 다시 나를 부를 테니 기다려라는 말을 해준 것에도 감사하지만,
난 No thanks!
이제 제2의 포닥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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